조종사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붙잡혀 들어간 수용소에서 건축에 대한 영감을 얻은 천재, 부드러운 천막이나 물방울처럼 보이는 디자인으로 현대 경량 건축의 기반을 다진 건축가, 프라이 오토.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그만의 아이디어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또한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구조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한 형태를 탐색하는 그의 접근법은 현대건축의 기초를 이룬다. 통찰력은 물론, 사명감까지 남다른 독일 건축가, 프라이 오토의 모든 것을 알아보자. |
프라이 오토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의 2015년 수상을 앞두고 하루 전날 세상을 떠났다. 심사위원회로부터 수상 여부를 전해들은 그는 원래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릴 시상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사상 최초로 수상자 소식이 곧 부고 뉴스가 되고 말았다. 이미 수상자가 결정되고 시상식만 남은 상황이라 프리츠커상은 그의 영전에 바쳐져야만 했다. 1979년 상이 제정된 이후 작고한 건축가에게 영예가 돌아간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
일찍이 1월에 수상 사실을 접한 오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발언은 본의 아니게 수상 소감이 되었다. "내 건축적인 경향은 자연재해로 빈곤해진 사람을 돕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건물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든 지금까지 해온 것을 계속할 것이다." |
1925년 독일 지크마르(Siegmar)에서 태어난 프라이 오토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1945년 4월 뉘른베르크 근처에서 연합군에 붙잡혀 전쟁포로가 되었다. 이후 프랑스 샤르트르 근처의 전쟁포로수용소에서 2년간 지내며 캠프 건축가로 일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제한된 자원으로 텐트처럼 가변적인 형태의 쉼터를 마련하는 건축 방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내 수용소에서 접한 텐트 형태의 구조물이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오토는 이런 형태의 집이야말로 가장 가볍고 유동적이며 환경친화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가 이후 그의 건축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48년 독일로 돌아온 프라이 오토는 베를린 기술대학교에서 건축을, 1950년 미국 버지니아 대학에서 사회학 및 도시개발을 공부했다. 그리고 1952년 베를린에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또한 그는 1954년 베를린 기술대학에서 토목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취미로 글라이더 비행기를 설계하며 공기의 역학 및 구조, 가벼운 프레임과 막의 구조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
그는 항상 최적화된 형태를 결정하고, 해당 구조를 테스트하기 위한 물리적 모델을 직접 제작했다. 1955년 카셀의 연방정원 전시회에서 그는 대형 텐트 형태의 임시 경량 구조체를 그의 첫 작품으로 선보였다. 1964년에는 슈투트가르트대학에 경량구조연구소를 설립하여, 은퇴할 때까지 연구소를 이끌었다. |
건축가로서 프라이 오토는 제한된 재료로 다채로운 경량구조물을 만드는 선구적인 작업에 한평생 매진했다. 마치 텐트처럼 기둥을 가운데 세우고 사방으로 케이블을 뻗어 천막 같은 지붕을 붙들게 하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혁신 그 자체로 평가받았다. 이는 벽체와 지붕으로 이뤄진 기존 벽돌 건축의 고정관념을 깬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오늘날까지 대형 경기장이나 각종 구조물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비눗물에 둥근 철사를 담갔다 꺼낼 때 생기는 '비누막' 구조 역시 프라이 오토가 처음 시도해 건축 분야에서 지금까지 활용되고 있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비누막은 경계가 있는 곡면 중에서 가장 작은 표면적을 가진다. 평균곡률이 0인 비누막은 가장 적은 재료로 가장 안정된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모형이다. |
프라이 오토는 좋은 건축가는 사회사업가이자 가족 주치의이며, 어떤 건물을 소유해야 하는지 처방을 내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각자 적합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라는 신념을 밝혀왔다. 즉, 그는 일찌감치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 건축가였던 것이다. 그의 건축물은 연구원이자 발명가, 엔지니어, 건축업자, 교사, 환경 운동가, 인문주의자 등을 모두 건축가에 대한 정의로 포용했다는 평을 듣는다. |
오토는 가변적인 구조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역시 소외 계층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데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자연재해로 빈곤해진 사람을 돕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건물을 디자인하고자 노력했다.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붙잡혔을 때 프랑스 내 수용소에서 접한 텐트 형태의 구조물이 그에게 영감을 준 덕분이다. |
1972년, 군터 베니시, 레온 하르트와 공동 설계한 텐트형 지붕으로 유명한 독일 뮌헨 올림픽경기장은 메인스타디움에 기둥을 세워 케이블로 천막 같은 지붕을 고정하는 방식으로 텐트형 건축물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스타디움과 공원이 한데 어우러진 생태공원 형태로 조성되어 심미적이면서도 활용성이 큰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
또 다른 대표적인 작품인 몬트리올 만국박람회 서부 독일관 파빌리온 역시 유목민 텐트를 닮은 천막 같은 형태로 고정된 지붕을 선보이고 있다. 이 두 작품을 통해 프라이 오토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이 건축공법은 이후 2000년 하노버 엑스포의 일본관 설계에도 도움을 주었다. |
다용도의 매달린 지붕 구조, 경량 텐트 모형의 막면 구조 공법을 개척하며 건축 역사에 새로운 자산을 남겨준 프라이 오토. 그는 전 생애에 걸쳐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건축의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가치를 반영한 남다른 건축을 짓는 데 몰두했다. 1972년 이후 40년이 흐른 지금, 수많은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건축가가 가져야할 신념과 역할에 대한 인식만큼은 프라이 오토의 시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